
두려움의 확성기 앞에서, 무엇을 믿을 것인가
히스기야 왕 제14년, 앗수르 왕 산헤립은 유다의 견고한 성읍들을 공격했다. 마침내 랍사게가 예루살렘에 도착해 성벽 밖에서 히스기야의 신하들과 마주했다. 그는 “네가 의뢰하는 이 의뢰가 무엇이냐”라고 물었다. 이 질문은 단순한 외교적 협박이 아니었다. 유다 백성이 무엇을 믿고 버티고 있는지를 공격하는 영적 질문이었다.
우리의 삶에도 비슷한 순간이 찾아온다. 질병, 재정 문제, 관계의 갈등, 미래에 대한 불안이 마음의 성벽 앞에 서서 묻는다. “정말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느냐?” 위기는 사건으로만 오지 않는다. 때로는 반복되는 생각과 불안한 목소리로 찾아온다.
랍사게는 먼저 애굽을 의지해도 소용없다고 조롱했다. 이어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까지 비웃었다. 그는 히스기야의 종교 개혁을 왜곡하며, 하나님이 오히려 유다를 버렸다는 인상을 주려 했다. 심지어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예루살렘을 공격한다고 주장했다.
더 치명적인 장면은 그가 백성들이 알아듣는 유다 방언으로 큰 소리로 외친 대목이다. 히스기야의 신하들은 아람어로 말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랍사게는 일부러 백성의 귀에 들리도록 말했다. 목적은 하나였다. 두려움을 퍼뜨리고 왕과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그는 항복하면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평안히 살게 될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러나 그 약속의 끝에는 포로 생활이 기다리고 있었다. 세상은 때때로 순종보다 타협이 편하고, 믿음보다 현실적 계산이 안전하다고 속삭인다. 그러나 달콤한 제안이 언제나 참된 평안을 주는 것은 아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랍사게의 목소리’는 존재한다. “기도해도 달라지지 않는다”, “네 형편에서는 믿음이 아무 소용 없다”, “현실적으로 계산해야 한다”는 생각이 반복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모든 목소리를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크게 들리는 말이 진리는 아니다.
랍사게의 연설이 끝났을 때 백성은 침묵했다. 히스기야 왕이 대답하지 말라고 명령했기 때문이다. 그 침묵은 패배가 아니었다. 거짓과 조롱의 언어에 끌려가지 않겠다는 절제였다.
신앙생활에서도 모든 공격에 즉시 답할 필요는 없다. 때로는 논쟁보다 기도가 필요하고, 설명보다 하나님 앞에 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이사야 36장은 아직 기적이 일어나기 전의 장면에서 끝난다. 상황은 해결되지 않았지만 믿음의 선택은 이미 시작되었다.
오늘 우리의 성벽 앞에는 어떤 목소리가 서 있는가. 불안인가, 실패의 기억인가, 사람의 평가인가. 그 목소리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크게 듣는 것이 믿음이다. 믿음은 문제가 없다는 선언이 아니라, 문제가 있어도 하나님을 마지막 의지로 삼는 결정이다.














